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쉰들러 리스트 (문단 편집) === 제작 과정 === 감독과 배급사 양쪽에서 걱정을 굉장히 많이 했다. 일단 스필버그 본인이 촬영 기간 내내 [[멘붕|멘탈이 남아나질 않았다]].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의 부모는 [[우크라이나]] 유대인이며 16~20명의 친척을 홀로코스트로 잃었다.] 그전까지 문서상으로만 홀로코스트를 알던 스필버그는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 사건의 심각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작중에서 그려지는 온갖 충격적인 광경들을 보면 이해가 간다. 담담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그려내 오히려 충격이 더 배가 된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시달려온 유대인으로서의 위치와 정체성 문제가 겹치면서 이성을 유지한 상태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에 엑스트라 중 누군가 밤 10시 30분에 칼퇴근해야겠다고 투덜거리자 뛰쳐나와 누가 그랬냐고 불같이 화를 냈을 정도로 히스테릭해지고, 절친한 [[로빈 윌리엄스]]에게 전화해서 날마다 '''나를 좀 즐겁게 해주게! 제발...'''이라는 식으로 하소연했다고 한다. 스필버그의 아내 케이트 캡쇼[*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의 여주인공이다. 스필버그에게는 두 번째 아내로, 영화 제작이 끝나자마자 결혼하여 현재까지 같이 살고 있다.]와 아이들, 부모까지 촬영장에 함께 있었고 심지어는 [[랍비]]까지 한 명 대동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트콤 '[[사인펠드]]' 방영분 VHS를 [[미국]]에서 [[폴란드]]로 수시로 배송했다고 한다. 진작에 [[장비를 정지합니다|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낀]] 배급사 [[유니버설 픽처스|유니버설]]은 이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으로 딱 한 가지를 내걸었다. '''쉰들러 리스트 찍기 전에 [[쥬라기 공원(영화)|쥬라기 공원]]부터 끝내라.''' 사장은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면 쥬라기 공원은 못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1992년 8월 쥬라기 공원의 촬영을 시작해 11월에 촬영을 끝냈고, 임시 편집본은 촬영이 끝난 지 1주 만에 나왔다. 이게 다 끝나고 나서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은 다음 해 3월에 시작되었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상당히 바뀐 것을 보면 선견지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배급사에 문제가 된 또 하나는 바로 흑백 촬영. 컬러 영화가 당연해진 시기에 흑백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희한한 요청이었다. 일단 흑백으로 극장 개봉까지는 받아준 것 같은데, 사장이 돈을 더 벌어볼 생각으로 '영화를 컬러로 찍어 나중에 [[VHS]] 발매할 때 컬러 버전도 내보자'는 식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스필버그는 거절하려 했는데, 현장에서 아무도 흑백 영화 촬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고생길이 뻔한 것을 진작에 알았을 것이다. 컬러 영화를 찍던 식으로 세트를 만들면 면과 면의 명암차가 크지 않아서 화면이 뭉개진다든지 하는 문제들을 사전에 발견한 제작진은 인위적으로 페인트를 칠해 세트의 명암을 조절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 영화는 총 다섯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백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나오는 [[유대교]] 예배, 후반에 나오는 쉰들러 묘소 참배 장면, 그리고 쉰들러가 안식일(토요일) 유대교 예배를 허용할 때 나오는 촛불,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장면인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https://www.youtube.com/watch?v=j1VL-y9JHuI|Girl in the Red Coat]], 두 군데에 걸쳐서 등장). 끝내 희생되는 이 소녀는 개봉 후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 소녀를 연기한 배우는 지금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구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첫 장면이 컬러로 진행되다 흑백으로 바뀌며 본 내용이 시작되고, 마지막 장면에서 시점이 현재로 바뀌며 다시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기법은 고전적인 기법으로 이미 오래전인 1939년에 [[오즈의 마법사(영화)|오즈의 마법사]]가 사용한 기법을 반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관객에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장치다. 이런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 희한한 흑백 영상을 함께 만들어낸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Janusz Kamiński)[*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폴란드계 미국인]].]는 이후 나온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지금도 일한다. 당시 [[뉴스위크]]지 보도에 따르면 촬영은 전부 폴란드에서 했다고 하는데 촬영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스필버그를 알아본 폴란드 노인이 촬영 현장에 다가오더니만 스필버그를 죽일 듯이 쳐다보며 마구 폭언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자식이 싫지만, [[유대인]]은 더 싫어. 왜냐면 네놈들은 히틀러는 악마, 유대인은 불쌍한 버러지. 이 따위로 떠벌리는 영화나 찍고 자빠졌잖아? 그렇게 너희는 언제나 자기들 유대인만 가엾다고 생각한다고! 당장 나가! 구역질 나는 놈들아!"''' 이 말에 스필버그는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주연 배우 [[리암 니슨]]이 화를 내면서 반론했지만 끝내 노인을 억지로 떼어내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노인도 거들어 스필버그에게 목매달아 죽으라는 손짓까지 하여 스필버그는 창백해져 고민해야 했다.[* 위 폴란드 노인의 [[반유대주의]]적 폭언은 저 사람이 [[네오 나치]]여서가 아니라 좀 복잡한 사연이 있다. 반유대주의는 원래 독일뿐만 아니라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 동유럽에서도 팽배했는데, 그 이유는 [[1차 대전]]의 패전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린 나치 독일과는 좀 다른 이유였다. 수백년 전 동유럽을 지배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에 정권을 장악한 폴란드인 귀족들은 [[독일인]] 및 [[유대인]] 상인들을 들여와 경제권을 넘겨주었고, 자국 농민들이 [[부르주아]]로 성장하지 못하게끔 막았다. 반면 연방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폴란드인]] 및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은 이들 폴란드 귀족과 독일, 유대 상인들의 밑에서 오랜 기간 착취당해야 했다. 이때 들어온 유대인들은 [[농노제]]가 없어진 이후에도, 그리고 나치가 쳐들어오기 직전까지도 폴란드 사회의 상류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그 중에서도 서민들은 자국을 갈라먹고 식민 지배하면서 학살을 일삼은 독일(+러시아)뿐만 아니라 연방 시절에 폴란드 귀족에 빌붙은 유대인들도 싫어한다. 거기다 나치 독일에게 유대인만 학살당한 게 아님에도 유대인 홀로코스트만 유명하니, 저 노인처럼 히틀러의 학살에서 유대인만 강조되는 것을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저 노인이 스필버그에게 품은 불만처럼 독일의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학살 또한 유대인 학살과 동등하게 재조명되는 것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서방 연합군과 소련의 공적에 가려진, [[자유 폴란드군]] 및 기타 레지스탕스들이 [[바르샤바]]나 [[르비우|리비우]] 등지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끈덕지게 독일에 영웅적으로 항전한 기록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은 동시에 '''역사적인 반유대주의 때문에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옹호하거나 적극적으로 돕는 이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도 18분 43초~54초에 폴란드인들이 게토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흙덩이를 던지면서 폭언을 퍼붓는 장면이 묘사된다. 하지만 현재 [[폴란드]] 정부는 과도한 민족주의와 '독일에 저항한 폴란드' 담론 활성화에 치우쳐 자신들의 유대인 학살을 망각하며, 심지어 일부는 전술한 적대감 때문에 폴란드인 학살을 띄우면서 유대인 학살을 폄훼하기도 한다. 폴란드인 학살, 우크라이나인 학살, 유대인 학살 모두 각각 동등하게 발굴되고 알려져야 하지만, 수백 년간 수많은 민족들이 흩어져 살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집어지고, 중층되고, 얽히고 설킨 동유럽의 상황은 이를 힘들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치에게 억압받던 폴란드-우크라이나-유대 세 민족은 서로를 돕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역사적인 적대감과 결합한 생존 본능,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독일 때문에 서로에게, 특히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몹쓸 짓도 많이 했다. 나치 독일이라면 학을 떼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진 이런 복잡한 반유대주의 정서는 매우 유명하고, 현재까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전쟁]]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는 사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